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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떠돌이의 습관

나에겐 여러 가지 습관 혹은 취미가 있는데, 대부분 무엇인가를 '모으는' 것이다. 스티커를 수집하고, 볼펜을 사모으곤 한다. 그중 요즘 제일 골칫거리는 세면용품 샘플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대부분 유통기한이 훌쩍 지나버린 샴푸, 린스, 바디 샴푸 등인데 버리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고(?) 있다. 

이 습관은 바야흐로 21살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가족 중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가게 된 나는 엄마와 남대문 시장을 가서 굳이 끌낭을 샀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크기는 요즘 도봉산 가는 등산객들 가방의 절반도 안되었다. 거기에 50일치의 짐을 싸려니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 유럽을 가는데 혹여나 샴푸가 없어서 못 씻게 될까 샴푸 샘플을 구하러 동네 화장품 가게들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여행용품이 많이 나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요즘 다이소에서 다양한 종류의 샘플들을 파는 걸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 이후로도 중동여행, 남미 여행 등을 갈 때마다 샘플들은 정말 요긴하게 쓰였고, 무엇보다 그것들이 처음에는 내 가방에서 부피를 차지하다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볼 때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결혼 이후로 나의 여행은 동남아 호텔 방문이었고, 결정적으로 코로나로 인해 아무데도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 샘플들은 그 유용함을 드러낼 기회조차 없이 썩어가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기회가 없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아무래도 이제 보내줄 때가 된 것 같다.